2. 여전히 배고픈 인간
금경경의 첫 문단에서 출가하여 대중을 이루며 수행하는 붓다의 모습은 현재의 승가(僧家)가 그 전통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걸식으로 간단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마는 .......
환경적응문제와 함께, 유사한 가치관과 유사한 삶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같은 삶의 패턴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동식물들의 집단서식과 유사합니다.
그것은 자연발생적인 씨족이나 부족사회, 그리고 종교적 신념에서 기인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동식물의 동종군집과는 달리 인간은 종의 구분 없이, 즉 피부색과 생김새가 서로 달라도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다면 공존 가능한 반면 그렇지 못하면 공존 불가능함을 현대사회에서 보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 같은 다민족국가의 번성과 한반도의 단일민족국가의 분단과 분쟁대치는 좋은 사례가 될 것입니다.
같은 가치관은 아닐지라도 인간사회의 검증된 보편타당한가치관을 존중하는 사회질서체계로의 발전노력(정치력)은 인류역사에 점철되어 인류의 공존을 보장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사회 지배계급의 욕구가 제어되지 못하여 공존에 문제가 생기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기고 새로운, 실험적일 수도 있는 사회질서를 열망하는 집단이 만들어지면서, 그들에 의한 그들을 위한 이념과 종교분쟁이 자연 발생합니다.
이씨조선의 초엽과 말엽에 유교와 신 구 카톨릭교가 한반도에 뿌리를 내린 반면 동남아 일부 불교국가의 종교성향은 국가 통치이념과 구분되어서 우리와는 대조적입니다. 그들 국가는 정치이념이 변화되어도 종교적 신념은 유지되고 있음이 그러한데, 그들 불자들이 이 걸식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음이 우리의 경우와 달라서 일까요?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국가에 공을 세운사람에게는 영토(경작지)를 상으로 주고 받았습니다.
남의 나라를 침공하여 획득한 땅을 나누어주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먹을거리의 보장이 보상이었는데, 민간에서 일꾼(머슴)의 세경도 쌀(곡식)또는 전답으로 주고 받았습니다. 또한 남이 해주는 훌륭한 식사를 제공 받는 일이 권력과 부의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부잣집에서는 조리사 가사도우미(식모)를 두고 있고, 산해진미를 찾아다니며 한 끼에 근로자 한 달의 급여를 사용하기도합니다. 중국의 풍습에 부자가 아닌 평민도 일 년치의 소득을 모아서 가족과 함께 최고의 식사 한번 하는데 기꺼이 투자한다고 합니다.
수렵으로 먹을거리를 구하던 원시시대는 사냥터를 두고 이웃들과 싸웠습니다. 동물들의 영역다툼과 같은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직접사냥을 하지않고 먹을거리를 안정적으로 구하는 방법으로 사냥꾼이나 복속된 부족들로부터 사냥된 먹을 거리를 빼앗거나 세금으로 획득 했을 것입니다.
경작과 목축(가축사육)시절에는 이 일들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부족국가가 탄생하였으며, 근대 중세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토분쟁과 정벌전쟁이 같은 목적으로 발생하였습니다.
영국이 경우, 곡식과 채소를 키우기에 부적합한 기후로 그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구하려면 할 수없이 바다건너 어딘가를 정복하고 가져와야 했을 것입니다. 기후 뿐만아니라 산악지역이나 토질이 척박하여 경작이 불가능하면 정벌전쟁으로 비옥한 영토를 확보 확장해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산악지역이나 농업이 불가능한 지역의 사람들은 이동하고 사냥하는데 잘 훈련되어 있었고 강인하며 무기를 잘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한 곳에 상주하며 경작과 가축사육을 하던 사람과 지역의 정벌은 가능했었을 것입니다.
무역이 활발한 현대에서도 머고사는데 필요한 자원의 획득을 위한 전략적 전쟁, 유유상종을 위한 통치목적의 이념과 종교를 위한 크고작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쟁이 공격과 방어행위라 보았을때, 어느한 쪽이 포기하면 전쟁은 발발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지배와 피지배 현상이 생길 것이고, 지배자의 목적을 피지배자가 수용해 주면서 전쟁의 목적은 달성 된것입니다.
대부분의 불교국가들에서는 이렇다 할 큰전쟁은 없었지만 피지배국가의 역사는 있었습니다.
이 금강경첫구절로서, 작지만 소중한 먹는 문제보다 더 큰 그 무엇이 있음을 붓다자신이 보여주고 가르친 영향이라 추측해 봅니다.
우리는 고려시대 몽고족의 침입으로 거의 피지배민족이 될 위기에서 팔만대장경을 만들면서 항거한 역사가 있습니다. 국가의 운명과 백성의 안위가 풍전등하에 있고 군사들은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을것인데, 군수물자도 아닌 팔만대장경을 많은 국력을 소비하며 만들었습니다.
정벌자의 입장에서 보면 상상하기 어려운 현상 이었을 것입니다. 여러가지 전략적선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고려군은 먹는문제와 죽는문제를 초월하고 있다'는 확신이 비 불교국가인 금나라 몽골인들이 지금의 핵무기만큼이나 큰 무기가 고려군은 물론 백성들에게도 있다라고 인식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정벌목적이 남쪽의 비옥한 농경지확보였다면 농사를 지을 줄도 모르는 그들에게는 무용지물인 농경지대신에 곡물이면 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고려인들도 '같은 종족인데 곡물 좀 보시하자'라고 생각 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구려의 후예라며 고구려영토를 되찿기위하여 왕조내내 북벌정책을 유지하며 무신을 우대했던 불교국가 고려는 국가정책과 통치이념에서 괴리가 엿보입니다.
차라리 불교를 국교로 숭상하지 않았다면 북벌을 성공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가정을 해봅니다. 물론 수차례의 시도 끝에 단 한번의 북벌전쟁을 이성계장군의 위화도회군, 즉 구테타로 실패함으로서 고려는 망하고 이씨조선이 탄생합니다.
불교국가 고려국왕 주변에는 늘 불교지도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그들이 북벌을 도왔을까요?
이씨조선 도읍지를 한성(서울)로 정한 무학대사는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장군 옆에 있었습니다.
이후 승려들은 유교를 국교로한 이씨조선의 건국을 도운 큰스님들 덕분에 현실정치참여의 병패를 깨닫고 산으로 들어가 수행증진에 매진 합니다. 그러나 국가고시인 과거시험 승과를 급제해야 스님이 될 수 있을 만큼 귀한신분(?)이 되었고, 필요시 국가의 부름을 받으면 승군으로써 임진왜란 등 전쟁에 참가하기도 합니다.
불자라면 계를 알고 지키려고합니다. 그러나 전쟁통에서는 그 계를 지키기 불가능 할 것입니다.
우선 죽기를 원치않는 생명체를 죽이는 행위, 즉 살생(살인)을 해야만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게 되므로 계를 어기게 됩니다.
전쟁과정에서 허락없이 남의 물건을 즉, 남의 영토나 먹거리 재물을 빼앗거나 손괴시키는 행위를 하게되므로 계를 어기게 되며, 자기의 양심과 관계없이 불가피하게 만들어진 군율을 따르게 되어 계를 어기게 되며, 적군의 아녀자들을 탐하여 계를 어기고, 이런 혼란과 혼돈으로 자기정신을 놓아버려서 계를 어깁니다.
불교국가 고려에서 불벌정책이 성공하지 못하고, 북벌전쟁을 계기로 망하기는 했지만 이민족에 의한 피지배가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당대 세계적인 불교국가인 중국의 당나라가 망한 것도 같은 상황이라 판단되며, 불교발상지 인도대륙에서 밀려서 실론섬에 자리한 불교국가 스리랑카, 동남아 불교국가들의 피지배역사도 그러한 상황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습니다. 천황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우주이고 자기가 주인이라는 불교의개념과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천황의 종일 수도 있고, 천황 혹은 주군의 명령을 받드는 것을 명예로 여기는 사무라이정신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비정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부분입니다. 이념적차별화가 이루어져서 당파로 나뉘어졌는데, 이것은 무(武)의 결집이 아닌 문(文) 즉 이념의 대립 입니다. 사무라이와 선비가 싸우면 누가 이길것 같습니까? 당연히 칼로 펜을 동강냅니다. 그러나 칼을 움직이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과정과 결과를 보면 알 수있을 것입니다. 선비정신과 사무라이정신을 겸비한 이순신장군에게 백전백패한 왜군의 수장들 옆에는 일본의 승려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잘모릅니다마는 왜군의 먹는문제와 생사의 인식문제를 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왜군수장들의 과욕을 억제시키고 경쟁적승리에 몰두하는 무리한 전투도 억제시키기위해서가 아닐까싶습니다. 그러나 어겨지는 계를 보며 같은길을 가야할 승려는 이미승려가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에계서 산지식과 지혜가 나올리 없습니다. 실패합니다.
불교는 전쟁과 거리가 멀 수 밖에 없습니다. 불자를 전쟁터에 투입하여 과연 승리 할 수 있을까요? 진정한 평화는 불국토에서 보장됩니다.
카톨릭의 십자군원정이 무슬림을 태동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근거보다는 무함메드의 태생과 성장 그리고 무슬림교의 창시활동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거상의 서자이고 거상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거상을 물려받았고 그것을 지키기위한 수단이 필요했었습니다. 당연히 배반이 있었서는 안되기 때문에 가신들은 욕심이 없어야하고 그것이 신 알라의 뜻이며, 그것을 어기면 신의 응징이 따름을 가르쳤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신의 계시를 받는 수단이 유대교의 천사였으므로 기독교와 뿌리를 같이한다고 하나, 그는 동방과의 무역을 위하여 왕래한 인도의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몇가지 점에서 그 증거가 있습니다. 물론 예수그리스도도 그러합니다.
무함메드는 동굴에서, 예수는 광야에서 나름의 도를 얻었습니다. 수행과 명상을 통하여 누구나 될 수있다는 또하나의 붓다가 된 것입니다.
한국불교가 여러 종파로 나누어져있고 기독교가 여러종파로 나뉘어져 있음을 보면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먹고사는 방법이 저마다 다르고 생각도 저마다 다릅니다.
고정된실체와 고정된현상이 없어서 공을 인식할 수가 있고, 공을 채우면서 그 다양함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존재할 수가 없으며, 상대방의 어떠한 인식도 자기잣대로 평가해서는 안됨을 불교는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있는데 이것은 사상(생각)의 자유를 기반으로 함을 말 할것입니다. 이것은 다양성을 보장하여 창의적 연구를 불렀고 또한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는 기반이 되었을 것입니다.
생각과 이념, 그리고 종교적신념의 다양성보장은 먹고사는문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해결해주고 있습니다. 생각과 삶에 제약이 많은 회교국가의 경제는 주로 부존자원에 의지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태생이그러하듯이 부존자원을 지키는 수단으로 적합한 종교정치제도일 것입니다. 광활한 사막과 산악지역에서 목축이나 방목을 해야하는 사회에 민주정치제도와 자본주의가 적합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또 흥청망청한 소비생활이 필요없는 사회에 서구식 문화가 맞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과 개신교의 마찰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래의 대규모 전쟁이 발발한다면 그들간의 전쟁일것입니다. 부존자원이 고갈되기 전에는 회교국 그들이 생각을 모두 바꾸지 않을 수 있음에 그들끼리의 전쟁도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먹고사는문제 먹을거리 확보문제 그것은 인류의 역사입니다.
먹는 문제는 욕구발전과 함께 끝없는 투쟁과 경쟁을 만들어냅니다.
인류의 모든 문제가 겉으로는 결과적으로는 다른 것으로 포장되어있지만, 그 기인된 바를 살펴보면 양질의 풍족한 먹을거리와 그것의 항구적 확보에 있을 것입니다.
생명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먹을거리에서 쾌감을 더한, 즉 동물적 먹이활동에 더하여 한계효용이 체감할 수밖에 없는 끝없는 정서적 만족을 가미하고 있습니다. 그 쾌감이 상대적 행복감을 주지 못한다면 한 끼의 멋진 식사를 위하여 일 년치의 소득을 털어 넣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은 쾌감의 노예가 되어 끝없는 투쟁과 경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목구멍은 포도청’이라 하니 결국 인간은 살기위하여 먹고 먹기 위하여 살아(무한경쟁)가는 것인가 봅니다. 인간 뿐 아니라,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먹이를 저장할 수 있는 생물은 쉴 새 없이 구하는 일에 경쟁을 합니다. 햇볕을 많이 확보하려는 식물의 성장경쟁, 영역과 먹이를 다투는 동물들... 심지어 미생물까지 예외 없이 생존경쟁을 합니다.
과연 인간은 평균수명(약80세로추정)을 다할 때까지 얼마나 먹어치울까요?
다음과 같은 추정치를 기준으로 보면, 곡물(사료포함): 약27톤 / 야채: 약12톤입니다.
(참고)
쌀(곡식류): 142gX3끼/일X365일X75세=11,662kg(583포/20kg)
고기류: 100gx3회/주X52주X75세=1,170kg( 닭고기기준 곡물사료소비량: 약3,000kg)
생선류: 80gx4회/주X52주X75세=1,248kg ( 양식어류기준사료소비량: 약 12,000kg)
야채류: 150gX3끼/일X365일X75세=12,320kg(12대분/1톤트럭)
공룡이나 코끼리 같은 거대한 초식동물과 체구를 비교해 보면 적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곡식은 씨만 체취하기 때문인데 대충 10배가량의 식물이 필요하다고 가정하면 약272톤의 식물을 소비하게 됩니다. 결국, 이래저래 직간접으로 한사람이 하루에 약9kg의 식물을 먹어치우는 것입니다. 만약에 재배나 사육 양식 저장 등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초식동물처럼 살았다면 인류는 멸종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세계인구 63억명이 하루에 9kg를 소비하면 5천7백만톤의 식물이 매일 필요합니다. 다행이 지금까지는 태양과 지구가 합심하여 나무를 비롯하여 그 몇 배를 생산해주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지구에 살고 있고 우리가 인간임에 정말 감사할 일이라 생각됩니다. 아직까지 지구가 별 탈 없이 인간을 살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그저 살아있음에도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이 대부분의 지구생명체는 종족번식을 위한 활동도 먹이활동 못지않게 치열하게 합니다.
인간의 경우 어쩌면 안전 그자체가 생명유지이므로 인간의 본능적 필요기능인 성에 대한 욕구가 첫번째의 먹는 못지않게 강하게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가사와 농사의 노동력 그리고 생산력과 안전(국방력)의 근간이 사람의 수와 직결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먹이사슬 최 정점에 있고 지구의 맹주가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더하여, 인간은 인생의 생 노 병 사와 고통의 문제는 피할 수 없지마는 만물의 영장답게 이 문제를 푸는 해법도 고대 인류사회에서 부터 찾아서 전해 주고 있습니다.
역사와 연대를 추정해보면 환인-환웅시대의 홍익인간사상, 공자-맹자사상을 근간으로 황화문명이 탄생하고, 수메르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인도와 이집트문명을 이루는 유다와 석가사상, 종교(宗敎)인 불교에 이어 천주교와 예수교 그리고 회교가 오늘날 인류의 먹고사는 문제의 나름의 문제인식기준과 그 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시당시의 먹고사는 문제가 현재의 그것과 달라져 있음에도 변함없이 각기 창시당시의 교리를 고수함으로써 무조건의 믿음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대인의 과학과 합리에 대치되는 부분을 현대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또 하나의 먹고사는 문제 그자체가 되고 있지는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종교가 현실적 문제를 푸는 해법이라 보여 짐은, 삶의 무한경쟁에 몰린 현대인이 경험할 수밖에 없는 패자의 고통을 치료할 대안이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에는 어디에나 마이너리그가 보장되고 치유하는 사회시스템이 있지만 그 경제적인 효율을 높이자면 패자의 정신적 상처를 빨리 치료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고정된 실체가 없어 공(空)이라하지만 공에 무엇이던 채울 수 있다는 대 긍정정의 의미가 있음을 안다면, 실패하여 공(空)이 된 상황일지라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 공은 채울 수 있다 입니다. 무엇으로 채울지는 본인의 몫이므로 만사가 본인의 작품이 된다고 합니다.
남의 작품은 수정해서도 안 되지만 수정하여서는 진정한 자기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작품이라야 자기 것으로 인정도 되고 수정도 가능하게 됩니다. 스승에게 배워서 따라하면 스승의 제자 일뿐이지만 그 영향만 받아서 자기 것을 만들어내면 청출어람이 됩니다. 홍익인간 사상에서 공자와 맹자가 그리고 순자 장자의 사상이 따로 존재하면서 유교 도교 그리고 성리학으로 발전합니다.
지금의 현상이 원하던 원치 않던 고정불변하지 못하므로 지금의 성공이니 행복 혹은 부(富)도 그 영속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무한경쟁에 의한 패배가 아니라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따라 늘 더 나은 더 많은 더 좋은 것을 추구하게 되므로, 본인이 그렇듯이 남도 그러하므로 침해당하거나 잃거나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하여 해마다 기업의 매출순위가 바뀌고 자본가의 재산순위도 바뀝니다.
시시각각 연예인의 인기순위가 바뀌고, 낮과 밤이 온도가 기후가 계절이 바뀌고, 어른이 되어가고 늙어갑니다. 재행무상이라 합니다.
따라서 변화는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사람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새로운 환경적응노력이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인데, 성공과 같은 상향 지향적이면 행복과 쾌감을, 반면 실패와 같은 하향 지향적이면 불행과 절망을 느낍니다. 어쩔 수 없이 변하는 삶의 환경대문에 혹은 대부분 전자의 행복감과 쾌감을 구하려고 끝없이 투쟁하고 경쟁을 합니다.
그러나 생존환경에서는 필연적으로 후자의 패자 혹은 잠재적인 패자가가 있어주어야 전자의 승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패자를 원치 않고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패자는 이를 스스로를 인정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상실감과 무력감 그리고 남겨진 부정적인 결과의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의지와 기력을 잃어서 건강을 잃게 됩니다.
이러한 패자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기력을 회복하는 일은 그 없어져서 공이 되어버린 현상을 그 어떤 것으로 채우는 일로써 진정한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패자의 남겨진 그것들은 인에 따른 연(결과)이며, 이 연의 실현으로 자신이 만든 인이 공(空)상태로 없어져서 더 이상은 실패라는 부정적인 연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공에 새로운 인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 일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연(因緣)혹은 인과(因果)의 법칙으로서 만물의 존재와 그 현상을 설명합니다.
모든 결과는 자신이 만든 인(因)에 따라 연(緣)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 현상은 시차(時差)는 있어도 오차(誤差)가 없다고 합니다.
기왕에 만들어진 인이라면 연을 기다려야 하지만 새로운 인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가 중요하다는 의미 일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인과연의 연속적인 발생과 실현인 셈인데, 지금당장의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인이 되고 미래의 삶이되는 연을 결정하게 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현대인이 통념으로 알고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의 미래불확실성과 대치되는 개념으로 이해 할 수 있겠으나, 인에 의한 연의 실현시점을 모르기 때문에 미래가 불확실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차 없는 연의 실현은 과거 2500여 년 동안 입증되고 있었음을 불교의 번창과 존재로 증명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이유 없는 무덤 없다” “처녀가 애기 낳나?” 등등 이 같은 이치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 자신의 인을 잘 몰라서 필연적인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큰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환경영향평가 및 의견수렴절차 공청회라는 문제예측시스템을 작동시키고 있습니다마는, .......
사적인일에 있어서는 자신 즉 인을 만든 존재를 어떻게 설정해야하느냐가 관건이 됩니다.
대부분 누군가가 남에게 좋은 일을 하고는 그것이 누군가로부터 되돌려 받을 복(福)이 되기를 기대하거나, 혹은 그 남도 나에게 좋은 일로 되갚아 주겠거니 하고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부분 상대가 그걸 망각하거나 다른 시각으로 인식함으로써 보답하지 못할 경우 서운함 또는 배반감을 느끼게 되어 배은망덕이라는 분쟁의 씨앗을 심게 됩니다.
인연법에 따라 언젠가는 어떤 형상으로 던 나타날 것입니다. 물론 못 다한 그리고 알 수없는 과거세의 인들도 연으로 함께 말입니다.
만약에 나(我)라는 존재를 의식하지 않거나 망각해버리면 박복이나 배은에서 느끼는 고통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설령 과거의 부정적인 인들이 나쁜 연으로 나타나도 불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순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위틈에서 외롭고 모질게 자라는 삐뚤어진 소나무가 울창한 소나무 숲의 멋진 소나무를 그저 바라보듯이 말입니다.
그 삐뚤어진 바위틈소나무는 울창한 숲속 멋진 소나무의 솔방울에서 여러 형제와 같이 나와서 바람을 탔으며 그중 하나가 바위틈에 스며들었고 일부는 개울에 빠지고 일부는 숲속그늘에 떨어져서 태어나지도 못했을 수도 있음을 모릅니다. 그저 지금의 그 모습과 열악한 생존환경을 극복하느라고 몸집을 작게 삐뚤이고 빗물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불운한 신세를 한탄하고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생존을 포기했다면 쓸모가 없어 인간에게 베임을 피할 수 있는 장수(長壽)의 행운을 맛보지 못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의 자신(존재)은 과거의 인(환경과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바람 타다가 운 좋게 태어난 씨앗이 아닌, 부모 나름의 정성과 최선의 돌봄과 자신의 노력이 경쟁력이 되어 필요한곳에서 필요한 역할을 하며 삶을 보장받고 있습니다.
과거의 인에 따라 맺은 부모와의 연이 각자의 생존환경기반이 됩니다. 나쁜 환경에서 태어났음을 부모에게 탓하려면 맺어진 부모와의 인연에서 인을 만든 자신을 먼저 인식해야 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여 나름의 성공을 거두는 일은 자신의 몫입니다. 경쟁자와의 불리한 혹은 유리한 환경을 가졌지만 결과는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모든 현상이 변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존재현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순간 순간을 어떤 생각과 행동으로 보내느냐가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좋던 나쁘던 현재의 나를 무시하고 미래의 나를 설정하면, 그리하여 미래의 나를 이루기 위하여 소원하고 다가가면 현재의 나가 어제의 나와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지금현재의 나가 미래를 결정한다는 결론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과거의 나 또는 인이 오늘의 나가 되고, 과거의 인은 오늘의 나가 소멸시키고 있다 이며, 지금 이 순간의 나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의미합니다.
과거의 나에 집착하거나 묶이지 않고 본연의 참나 만을 인식할 수가 있다면 미래의 나는 자유롭습니다.
원하고 노력하는 만큼 변화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무아(無我)는 “무엇이던 될 수 있다”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한 시냇물이 바위를 비켜가듯이 그 어떤 것과도 마찰이나 분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악연을 피할 수 있고 희노애락과 생노병사의 문제까지도 다른 시각으로 보여 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각을 ‘자신만의 안경’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인식하는 세상사는 남과 다를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세상의 돌아가는 이치를 멀리서 넓게 가까이서 깊게 볼 수가 있어서 눈앞의 현상들에 분노하거나 언젠가 변화될 형상에 집착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자신만의 안경을 반야(般若)라는 검정된 지혜의 틀로 다듬어진다면 그 효력이 크다고 합니다. 실제로 검정되지 않은 각자의 안경으로 세상을 보았기에 후회스러운 일들로 지난세월을 보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그 나름의 반야의 안경을 끼고 이 글월을 쓰고 있지만 세월이 흘러서 이 글월을 보면, 지금의 그 나름이 꽤 도수가 약한 안경이었음을 발견하리라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돋보기도수가 높아지듯이 나 자신을 내가 왔던 곳으로 멀리 떠나가면서 먼 곳에서 더 크게 볼 수가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본마음 참 나라는 존재는 대자연이고 우주에너지의 일부라 여겨집니다. 거역할 수없는 자연의 섭리가 바로 참 나(성품)로 보입니다.
2009.10.03
김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