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문제4
1. 성인들의 그 문제를 엿보다.
“이와 같이 난 들었다.
어느 때에 부처님은 사위국에 계시면서 큰비구중 일천이백 오십인(人)과 머물렀다. 그런 때에 세존께서 공양시간 맞추어서 옷을 입고 발우 들고 사위대성 들어가서 차제대로 걸식한 뒤, 본래자리 돌아와서 공양을 끝내시고 가사발우 거두시고 발을 씻고 자리 펴서 편안히 앉으셨다“.
위 글월은 불경 “금강경”의 제1분과이며 선가에서는 금강경의 전체내용을 함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금강경은 ‘다이아몬드수트라’라고하며 불경 중에서 가장 핵심사상을 담고 있고,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할 수도 있는 혜능대사의 ‘육조단경’이 이로부터 탄생하였으며, 그 사상은 우리나라 조계종이 이어받았다 합니다.
불교행사에서는, 한때 모든 공식행사 때 국민의례와 함께 외웠던 그 '국민교육헌장'처럼 참가자모두(사부대중)가 ‘반야심경’을 독송하는데 그 마하반야바라밀타심경이 불교사상을 함축하고 있고, 금강경은 불행(보살행)의 핵심이라고 하니, 왜 저 끼니활동이 전부로 보이는 수행자의 일상을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의 도를 구하는 불자의 행이라 압축설명하고 있는 걸까요?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등으로 어떤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왜? 가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나 마찬가지라고 하니 무엇을 가르치고 싶은지를 알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왜? 일까요?....
단순한 생명유지활동 외에 무엇이 엿보입니까?
각자의 시각은 달라서 보이는 형상이 다르며 그 내용도 다름을 전제로 지금현재의 본인의 시각으로 보여 지는 바를 기술하고자합니다.
첫째, 한 종교(불교)의 창시자(붓다)가 비구큰스님 중에서 아라한(나한)의 경지에 도달한1,250명의상수제자와 걸식을 비롯하여 일상을 같이하는 모습자체가 놀랄만한 일입니까?.
무아(無我)일까요?
아니면 초원에 떼 지어 다니는 누우떼 소떼, 코끼리떼 등의 자연스런 먹이활동 집단을 리더하는 모습으로써, 인간의 지나친 식탐욕구와 그것의 영구적 보장을 위한 소유욕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함일까요?
무명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의 쾌감이 무한한 인간의 욕구충족을 능가함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하루 한끼의 걸식으로 배고프지 않았을 까요?
그들의 허기짐은 따로 있었을까요?
멀쩡하게 잘 먹고 잘살고 있는 사람, 아니 왕세자가 걸식을 하려면.... 신분과 자아 자존심 불필요 등등으로 엄두도 못 낼 것입니다. 이때 용기라는 단어를 떠 올릴 수 있는데, 과연 그는 이문제의 해결로 자신을 이겨낸 진정한 영웅(Great Hero)이라 불리는 걸까요?
그리하여 지금 그의 사상과 가르침을 따르는 분들이 그의 사리가 모셔지지 않은 사찰의 주 건물(대웅전)에 그 위대한 동상(불상)을 모셔두고 그 앞에서 3보에 귀의함을 맹세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가 진정하고 유일한 영웅이었기에 그러할까요?
붓다의 의문은 사람을 비롯한 생명체의 죽음이었다 합니다.
탄생하여(생겨서) 존재하는 모든 형상과 현상은 변화하여 결국 사라진다는 과학적 진리를 터득함으로써 의문은 풀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며, 존재하는 동안 무엇을 하고있느냐라는 과정은 너무나 천차만별하여 당시의 환경으로는 그 헤아림이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마는 오늘날 첨단과학으로 밝혀내는 그것들은 2500여년 이전의 그 헤아림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인류의 스승이라 추앙받고 붓다(깨달은 자)라고 지칭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중생에게 불성(깨달을 수 있는 감성)이 있어서 모두 붓다가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발견한 진리도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전제하고 누군가 그것을 깨달으면 붓다(부처)가 된다는 의미로보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절대성을 배제함으로서 그것을 탐구하는 제자들의 노력이 지속되어 오늘날의 첨단 인류문명과 접속되게 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Gautama Siddhartha 라는 그의 본명보다 석가모니(釋迦牟尼, Sakyamuni: 사캬집안의 성인)라고 불리는 그는, 그가 지칭하는 무한량의 부처가 있음에도 인류에게 유일하게 부처님(불타; 붓다, 산스크리트어: बुद्ध, Buddha : 깨달음을 얻은 사람)혹은 붓다(서양)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무량한 붓다가 그의 경지를 넘지못하고 있음을 인정하기도 하지만, 큰 깨달음에 도달한 선지식들은 종파를 나누면서도 붓다의 시조인 그를 부정하지않고 있으며 그들도 그를 부처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과연 그는 어떤 안경(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까라는 의문으로 그가 말하는 반야라는 안경을 그가 말하는 방법으로 비슷하게 만들어서 끼어 보았습니다.
심신(육신과 정신)이 분리되는데 정신이 육신을 지배하며, 정신은 마음이라는 또다른 영역이 있어서 육신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마음은 자기가 끼고있는 안경의 도수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집니다.
도수가 높은 안경으로는 천체만원경으로보는 먼거리의 세상전부와 보이지않는 거리를 한번에 전부 볼 수있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공간의 형상 뿐만아니라 시간과 현상도 보입니다.
공간을 줄여서 보면 세상을 손바닥위에 놓을 수 있어서 복잡한 만상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손안의 모든것은 소중하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시간을 줄여서보면 인간수명 100년을 단 하루로 볼 수 있습니다.
모든생명체가 결국 이세상에서 없어짐이 보입니다.
그것을 모른체 살아가는 생명체가 불쌍해 보입니다.
그것을 알고 살아가는 생명체는 유한한(얼마 남지 않은)수명의 소중한 시간을 아쉬워 하고 억울해 합니다.
결국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들은 본능적으로 그생명의 연장을 갈구하는 수단으로 종족번식 혹은 번창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합니다.
그것이 삶이며, 그 삶을 위하여 생명유지를 위한 제반활동을 합니다.
다른 색안경을 끼워서 볼까합니다.
각자의 삶을 위한 투쟁속에서 같이살 수 있는 방법과 규칙이 필요하여 '戒'를 만들고 그것을 지키기위하여 '定'을 수단으로 하였으며 계와 정을 지키기 위한 도구(안경)를 '慧'로 만들어서 이를 가르치는 일을 佛敎라고 합니다.
戒(계)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해야할 일은 꼭하고, 하지말아야 될 일은 꼭하지말아야한다는 일체의 법(순리)을 말합니다.
상황에 따라 현상과 판단이 달라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가 없는 무지한 상태에서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판단은 원치않은 결과(악업)를 낳게됩니다. 즉 나쁜 인에 의한 나쁜 연, 악연을 낳게됩니다.
무의식(잠재의식)상태에서의 판단 그 자체를 알아차림은 '정'에서 나오고, '정'은 결과를 만들 원인을 통제할 수 있는 '혜'를 불러서, 결국 '정'이 없이는 '혜'를 끌어낼 수 없어서 모든행위는 '탐진치(貪嗔癡)'에 빠진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행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탐진치, 탐욕심과 노함과 어리석음의 결과는 지옥과 같을 것입니다.
현생계의 대표적인 지옥은 감옥인데 탐욕으로 발생하는 사기죄 절도죄, 노함으로 발생하는 살인죄 폭행죄, 자신은 물론 상대방의 탐욕과 노함을 못 알아차리는 어리석음으로 발생하는 죄는 감옥행입니다.
설령 감옥이 아니라도 자신의 탐진치로 인한 자신과 주변의 고통은 생지옥일 것입니다.
죽어서는 혼자서 지옥간다고 하지만 살아서는 주변사람까지 생지옥으로 이끄는 셈입니다.
'정'은 무의식의 자신, 즉 습관적이고 잠재적인 자신과 구분되는 자신, '반야'라는 안경을 낀 상태의 자신을 유지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수행을 하던 행불을 하던, 항상 깨어있는 연습을 하여 습관과 잠재의식조차 반야안경을 끼워주는 상태입니다. 예상치 못한일이 생겼을때도 그것의 진면목을 알아차리고 여여부동하다면 "정"이 완성된 상태 일 것입니다.
반야의 안경은 인간의 보편타당한 가치관(학습안경)과 다릅니다. '학습안경'(필자가 붙인 이름)이 자본주의 시장경제 민주시민이라는 이념적 틀안에서 동원되는 무한경쟁에서 이기는 수단을 찾는 도구라면, 반야의 안경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닌 윈윈, 즉 상생을 찾는 도구입니다.
시험성적으로 우열을 가리는 학창시절과, 성과와 업적으로 우열을 가려서 연봉이 결정되는 직장에서는 철저하게 학습안경을 끼어야 했었습니다. 무자비한 생존게임에서는 도수가 높은 안경일수록 유리하므로 치열하게 도수 높이는 공부를 해야합니다.
그러나 그 삶에 문제가 생겼을때 다른 안경이(반야안경) 있어야 또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로 '혜'입니다. 가장 높은 도수를 측정해주는 바로미터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입니다.
반경의 안경을 끼면 습관과 잠재의식으로 움직이는 또하나의 자신을 발견(견성)하게 됩니다.
그놈이 탐욕하고 성질부리고 경쟁에서 이기거나 살아남기 위하여 추한행위를 하는것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놈이 무슨짓을 하려는지 알아차리면 그놈을 통제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결과도 예측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그놈)의 케릭트나 정체성을 헤체시켜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지 못함을 걱정하게 되는데 남과 구분되는 존재는 속박을 의미합니다. 속박은 또하나의 속박을 나아 결국 탐진치를 버리지못하게 됩니다.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탈, 탐진치에서 벗어나는 니르바나(열반)는 무아, 즉 그놈과의 결별이 대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성품이 사라지면서 다시 태어날 특정지워진 자신도 없어집니다. 불생불멸이 가능해 질 것입니다.
자신의 안경도수와 색깔은 자신이 선택합니다. 여기까지의 도수와 색깔은 미래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 나중에 볼까합니다.
둘째, 우리나라에서는 몇 분만 큰스님이라 불리고 있는데, 여기서는 큰스님들 중에서도 최상의 경지에 도달한 아라한(불생불멸의 단계)이 1,250명이라 하니 상상하기 힘든 큰 대중이 집단수행을 하고 있음이 그러한데,.... 단체 생활에서 오는 육신의 제약보다는 그 당시 힌두신으로 부터의 해방에서 오는 정신적자유와 단마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 고대 선지식들의 용기 있는 삶일까요?
그 누구 그 무엇과도 다툼이 필요 없는 무소유, 무주, 무아.... 는 걸림 없는 자유를 보장합니다.
깃틀 처름 가벼운 삶....
대자연의 일원으로서의 생명유지활동에 순응하는 여여 부동한 존재현상을 표현하는 걸까요?
인간의 본능을 순수 대자연에서 찾고 공존하는 삶의 동남아의 한 최빈국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았다는 조사자료의 보도가 있었는데, 빈부가 인간의 행복여부를 결정짓지 못함을 증명함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단지 상대적 부와 빈곤을 느낄 뿐일 수도 있습니다.
행복한 거지를 불행한 부자가 함부로 대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카스트제도하의 인도인은 신분의 차별이 없는 불교나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불교국가의 스리랑카 나 회교국가의 파키스탄이 또는 방글라데시로 이주할 수 있었는데도 대부분 힌두교의 인도인으로 남아있습니다.
우월한 이념과 가치관역시 상대적 비교에서 비롯됨일 것입니다.
그 자체의 존재를 인정하며 공존하는 인류사회는 기후의 다양성이 다양한생물의 공존을 보장하는 지구본연의 모습을 유지시켜 주리라 생각합니다.
국가별 부의 상징인 (글로벌)대기업들이 그들의 생산품과 서비스 물을 무차별하게 팔기위하여 신 시장을 개척합니다. 아프리카의 오지에 최첨단 통신기기와 미디어기기, 그리고 가전제품과 패션물 자동차 음식물이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벌어질 일들을 상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들의 생존을 보장했고 신격화 되었던 대자연을 우습게 보지는 않을까요?
소유와 자아는 파괴를 부릅니다.
소유는 큰 존재를 작게 구분시키고, 자아는 남과 나를 구분 짓습니다.
구분된 작은 개체는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왜냐하면, 고정된 형상과 성향으로 그 개체를 특정지움으로써 가치의 불변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아(자존심)는 스스로를 묶어서 무아의 대자유와는 반대편에 있습니다.
셋째, 주된 내용이 한 끼의 식사로써, 남는 음식을 구걸하기위하여 보시자의 식사시간에 맞추고, 외출복(가사)을 정확히 챙겨 입고, 정갈하게 준비한 그릇(발우)을 챙겨들고, 빈부구분(차별) 없이(차제대로)일곱 집을 방문하여 음식의 질과 관계없이(쌀뜨물이라도) 받아들고, 본래 자리로 돌아와서 식사(공양)를 끝내고, 외출복과 빈 그릇을 챙겨두고, 맨발로 걸었던 발을 씻고 자리 펴고 편안히 앉아, 인간의 생사고락과 생노병사의 문제를 초월하는 삶을 전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의미의 정법과 정도가 무엇인지와 한 생명체로써의 육신을 관리 유지하는 또 다른 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일까요?
무엇을 언제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언제까지 먹느냐?
그것은 어느 생명체와 별다름 없이 먹이활동의 문제였을까요?
말하자면, 생명유지에 필요한 음식을 걸식으로 해결하면 취사도구가 필요 없고, 취사공간이나 저장 공간이 필요 없으며, 따라서 고정된 거주 공간 즉 집이 필요 없습니다. 물론 음식재료도 필요 없으므로 음식재료를 구할 돈도 필요 없습니다. 의식주(衣食住) 생(生)노(老)병(病)사(死)의 문제에서 벗어나 있는 삶을 표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엄중한 의식처럼 표현한 걸식의 개념은 최소한의 생명유지에 필요한 먹는 문제를 비록 걸식이지만 중차대한 생(生)의 대사(大事)로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간에서는 “잘 먹고 잘 살고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일을 안부를 묻는다고 합니다.
안 먹거나 잘못 먹으면 죽으니 안부(安否)의 여부는 먹는 문제의 순조로움 여부일 것입니다.
먹는 문제에 걸림이 없다면 안부 즉, 생사에 걸림이 없다는 의미일까요?
이 문제에서 완전히 해방되면,
목구멍이포도청이라서 억지로 참고 해야 될 일이, 바로 의미 있는 자신의 삶의 이유를 쫒아가는 참을만한 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없어지고 즐거워지지 않을까요?
먹는 문제에 발목 잡히면,
과잉섭취로 인한 대사증후군을 알면서 동물본능적인 식탐, 그리고 그것을 위한 무한경쟁, 결과적으로는 병들고 죽는 일에 시간단축 경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위 글월은 비추어 줍니다.
불만족으로 인한, 하지 않아도 될 무한경쟁은
수많은 인연(원인과 결과)을 만들고, 한이 되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수반합니다.
어느 한쪽이 이기면 어느 한쪽은 지고, 누군가가 돈을 벌면 누군가는 돈을 잃습니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기쁘고 행복하면, 누군가는 화나고 불행을 느낍니다.
그러나 결국은 맑고 흐린 날이 있고, 오르막길은 내리막길을 수반하므로 누구나 희노애락은 피할 수 없을것 같습니다마는 희열(환희)과 낙만을 가질 수는 없을까요? 어느 누구의 노함과 슬픔을 주지 않고 기쁨과 희망을 주면서...
그 왜? 가 바로 이문제인 것 같습니다.
만족하는 법을 배우면, 만족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과 만족은 비례합니다.
따라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09.08.15
김재성